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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에서 말했듯이 나는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가지고 산다.
벌써 약 복용 중 인지 4년이 넘어가고 있다.
이제 많이 좋아져서 거의 90% 완치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다.
하지만 뇌에 잔상처럼 남아있어서 약은 가끔씩 먹어 주고 있다.
일상을 보내면서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에 공황을 불러오는 방아쇠가 있나 보다.
4년 전이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첫 방문은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목동역에 있는 연세필정신과의원이다.
전화로 예약하고 방문을 했다.
내가 읽던 불안장애 관련 책에서 내가 경험하는 증상을 노트해가면 진료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적어갔다.
하지만 이것 또한 쉽지 않았던 게, 내가 어디가 정확히 아프고 비정상이라고 알지 못했기 때문.
그걸 알았으면 내가 의사 하지...
일단 책에 나온 흔한 증상 중에 나한테 해당되는 거를 적은 것 같다.
내가 겪던 증상들.
가만히 있다가 심장이 두근 거린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다가도 특정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발생한다.
발한. 항상 식은땀이 난다. 덥거나 춥거나를 떠나서 그냥 항상 긴장이 되어 있다. 추운 겨울 영하 온도에서도 땀이 난다. 더워서 나는 게 아니라 그냥 뭔가 잘못된 느낌이다.
땀이 나니 항상 몸이 뜨거운 편인데 어떤 상황에서는 갑자기 온몸이 차가워진다.
숨쉬기가 어렵다. 뭔가 숨 쉴 때 걸리는 느낌.
복부 불편감. 음식을 먹으면 몸이 조여 오고 뭔가 불편하다. 그래서 음식을 피하게 되고 굶게 된다. 차라리 굶으면 편하니까.
사람들이 무서울 때가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이동 중 갑자기 발작이 나타나면 누군가 나한테 와서 피해를 끼칠 거 같았다. 마치 칼이라도 들고 와서 나를 찌를 것 같은 두려움.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온몸에서 땀이 나고 어지러워서 기절할 거 같았다. 유일한 대처방법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하철이라면 다음 역에서 내려서 쉬었다 가야 한다. 버스라면 아무데서나 빨리 내려야 한다.
무대공포증. 사람들 많이 있는데 가면 이미 힘든데 발표를 하거나 앞에 서면 정말 죽을 심정이었다. 다 나를 욕하고 있는 느낌. 나를 죽일 거 같은 두려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24/7 머릿속에서 맴돈다. 생각이 없이 멍 때릴 수가 없다. 항상 어떤 걱정과 두려움이 떠오른다.
병원에 들어가 보니 매우 조용한 병원에 대기자 몇 분과 데스크에 간호사 한 분이 게셨다.
"안녕하세요 진료 예약한 K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조금 기다리시면 성함 불러드릴게요."
"네..."
처음이라 어색하고 떨렸지만 이왕 온 김에 제대로 된 진료를 받자 하는 심정에 나름 기대가 되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원장님 방에 들어가서 1대 1 진료를 봤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네 제가 어떤 책을 보다가 저도 불안장애가 있는 거 같아서요...."
하면서 수첩에 적어온 내 증상들을 보여드렸다.
아마 이런 내용들을 안 적어왔다면 말로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 하고,
빼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행이었다.
선생님이 쓱 보시더니,
"그럼 진단을 하기 전에 설문지 같은 거를 해볼까요?
이게 좀 비용이 있는데 이제 보험처리가 돼서 괜찮을 거예요."
내 기억으로는 한 5만 원이었던 거 같다.
(예전에는 몇 십만 원 됐다고 한 거 같은데 이제 건강보험에 포함되었다고 했다)
옆방으로 가서 설문지 묶음 한 3개 정도를 받고 연필을 받았다.
간호사분이 "한 4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다 끝나면 말씀해주세요"
라고 하시면서 나가셨다.
창가 너머로 목동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작고 조용한 방에서 나는 설문지를 적어갔다.
작성하면서 이걸 얼마나 솔직하게 적어야 할까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정말 심한데 "매우 그렇다" "조금 그렇다" "그렇다" 등 YES에도 여러 가지 답변이 있어서
난감했지만 최대한 내가 살면서 느낀 대로 적어나갔다.
한 40분 정도 지나고 다 완성할 수 있었다.
간호사분한테 다시 드리고 10분 정도 기다리니 원장님 방으로 다시 호출되었다.
설문지를 보면서 선생님이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고 슬퍼 보였다.
"좀 많이 심각한 거 같아요"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그렇게 온갖 병원을 다녔지만 다 멀쩡하다고 했는데,
나는 정신병자였구나....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절망스러웠다.
내 인생 참 망가졌구나.
정신병이라니....
하지만 조금이 나마에 긍정을 발휘해서,
희열을 느꼈다.
아... 드디어 내가 뭐가 문제인지 찾았구나.
다행이다.
이제 고칠 수 있겠다.
참 다행이다.
그 후로 선생님과 내 증상과 가족 및 성장과정에 대해서 한참을 얘기를 나눴다.
나는 내 과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남한테도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했지만,
왠지 그 상황에서는 꽉 잠겨서 마음 먼 구석에 버려진 그 과거들을 하나하나 다 끄집어내었다.
왠지 그래야 내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조그마한 희망에...
30분 정도 대화를 나눴나.
선생님이 이제 처방을 내려주시겠다고 했다.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일주일치만 약물을 주시겠다고 했다.
혹시 부작용이나 문제 있으면 꼭 연락 주세요 라는 말에 살짝 무서웠지만
뭐 설마 죽겠어?라는 용기를 냈다.
"감사합니다."
나오면서 정말로 진심 담은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은 내 삶을 돌려주신 분이라고 나는 아직도 믿는다.
감사합니다.
간호사분한테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면 되는지 알았는데,
데스크 뒤에서 바로 약을 포장해서 주셨다.
진료비/테스트비/약값 다 해서도 10만 원이 안됐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돈도 없는데,
들어있는 보험도 없는데,
앞으로도 꾸준히 다녀야 하는데,
병원비가 나오면 매우 곤란했다.
다행이었다.
마무리를 하고 대기실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약 한 봉지를 열어서 삼켰다.
무려 4-5 알이나 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이었다.
살아야지 라는 마음에 꿀꺽 삼키며 병원을 나왔다.
뭔가 후련하지만 착잡한 마음을 붙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버스가 17분 후 도착이란 표시에 뭐야 했지만 뭐 급하지도 않았고,
나는 이제 내 문제를 찾았으니 버스 기다리는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버스가 도착해서 카드를 찍고 자리를 찾으려니 없어서 그대로 서있었다.
근데 갑자기 그 순간, 마치 내 26년 삶의 무거움이 몸에서 서서히 흘러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살짝 술 마셔서 취한 느낌이랄까.
아니 그런 느낌이랑은 또 달랐다.
이건 뭔가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었다.
안 보이는 어떤 형체들이 나의 심장과 목덜미를 평생 꽉 잡고 있다가,
갑자기 나를 놔줘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 이게 약의 효과인가.
큰 숨을 내쉬어 산소가 폐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히 전달되었다.
마음속에 모든 걱정거리들이 사라졌고,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버스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 옆에 서 계시는 아저씨,
버스기사님.
그냥 다 아름다웠다.
아 이게 행복인 건가?
나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행복했다.
온몸이 릴랙스 되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도 한 발걸음이 가벼웠다.
거리를 내려오면서 너무 행복했다.
행복했지만 뭔가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렇게 고생하고 살았을까?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있는데,
나는 왜 26년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을까.
슬픔과 행복이 공존하던 그때.
나는 삶의 목표가 생겼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 약을 평생 먹어야 한다 해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도 뭔가 힘들고 잘못됐다고 느끼면 상담 꼭 받아보시길 바랍니다.
한번 사는 인생, 꼭 행복하게 살기를 빌게요.
다리가 아프면 정형외과를 가듯이,
마음이 아프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는 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믿습니다.
불안장애 자가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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